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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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장군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충절의 표상이 된 선조

문과에 급제한 선조

효성이 지극한 선조

장하신 효열부(孝烈婦)

 

 

17세~20세의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여 대를 이을 자식도 두지 못해 후사(後嗣)를 입양하기도 하였고

유복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정성을 다해 시부모 봉양과 종가의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한평생 정절을 지킨 효열부의 숭고한 효(孝)와 열(烈)이여!

 

 

m03.png 효열부(孝烈婦) 원주이씨(原州李氏) 기적비(紀績碑)

 

 

자고(自古)로 충(忠) · 효(孝) · 열(烈)은 국가의 대전(大典)이요, 우리 민족이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인륜의 도리이다.

향당과 온 고을에서 효열(孝烈)로 추앙 받는 유인 원주이씨는 강릉부사 (江陵府使) 휘 영화(英華)의 후손인 선비 기춘(基春)의 딸로 순조 16년 병자(丙子 4201 ; 1816) 11월 15일에 탄생하였으니,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유하고 지행(志行)이 유한정숙(幽閑貞淑)하였다.

 

방년 19세 때 여름,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원손이요 병자호란 때 진사로 호남의병장이었던 김해김공 휘 연지(鍊之)의 8대손 유성공(有聲公)과 혼례를 치른 지 겨우 10여일, 우귀(于歸)하기도 전인데 불행하게도 천만 뜻밖에 부군의 별세를 당하여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급기야는 부군의 뒤를 따라 수차 자결(自決)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을 잃고 의지할 데 없는 60노령인 시부모의 간곡한 설득과 주위 사람들의 절절한 위로에 감동되어, 차마 자결하지 못하고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예에 따라 3년 상을 마치고 평생 동안 흰옷을 입고 지내며 시부모 봉양과 종가의 사당 제사를 받드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가세가 곤궁함으로 길쌈으로 가업을 삼았고, 중년에 이르러 시부모의 6년 거상(居喪)에도 조석으로 상식하며 초상과 장례의 예법을 조금도 소홀히 함이 없었으며 슬퍼함이 지나쳐 몸이 몹시 쇠약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향당과 이웃마을에서 그의 효열(孝烈)을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만년에 종질 노혁(魯赫)으로 입양하여 대를 이었으니, 그 자여손(子與孫)들도 효도를 계승하고 모두가 인품이 성실하고 후덕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효손(孝子孝孫)이 끊이지 않으니 하늘이 큰복을 내려준다」 라는 말은 이 효열부 원주이씨를 이름이라 하겠다.

 

장하여라. 원주이씨의 효와 열이여 !

재행(再行)하기도 전에 청상의 과부가 되어 80평생 정절을 지키며 장부가 해야 할 온갖 일들을 힘써 행하면서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종가의 제사를 받들어 승선유후(承先裕後)하였다. 고종 32년 을미(乙未 4228 ; 1895) 5월 1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80세이다.

 

인륜의 근본 도리를 몸소 실천한 효열부 원주이씨는 고금에 보기 드문 효와 열부의 표상이 되어 온 천하의 규범이 되므로, 해남향교기(海南鄕校記)·삼강록(三綱錄) · 해남문헌집(海南文獻集)에 실려 있다. 이 탁관(卓冠)의 출천지효열(出天之孝烈)은 백세 귀감이 되어 일월과 같이 영원토록 찬연한 빛이 되리.

 

단기 4332 서기 1999 기묘(己卯) 4월 상한

해남향교(海南鄕校) 전전교(前典校)

남원인(南原人) 윤재진(尹在振) 근지(謹識)

 

 

 

m03.png 효열부 창녕조씨(昌寧曺氏)

 

 

효열부 창녕 조씨는 선비 병선(秉璇)의 딸로 헌종(憲宗) 8년 임인(壬寅 4172 : 1842) 8월 27일에 탄생하였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백당공의 15대손인 요택(堯鐸)에게 출가하였으니, 타고난 천성이 정숙하여 요조숙녀의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었다. 시부모에게 아침 저녁의 문안 인사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고, 가난한 살림이지만 음식 봉양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효부로 칭송을 받았다. 또한 동기간에 우애가 돈독함은 물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예의범절에도 조금의 소홀함이 없었다.

 

20세가 되던 해에 불행하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天崩之痛〕, 곧 남편을 여의는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그 슬픔을 가눌 길 없어 남편을 따라 자결(自決)을 하려 하였으나, 늙으신 시부모 양위분의 봉양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 차마 자결하지 못하고 모진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매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항상 부드럽고 상냥한 말씨와 환하게 웃는 고운 얼굴로 오직 시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함을 최우 으로 삼으며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35세 되던 해에 시어머니가 천수를 다하니 슬퍼함이 지나쳐 몸이 여위기에 이르렀고, 예에 따라 초상과 장례를 마치고 3년 동안 조석 상식을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밤낮 없이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해내야만 했고, 험난하고 고단한 삶을 극복하기 위하여 눈물과 외로움을 참아야만 하였다. <당질(堂姪) 영중(泳仲)을 입양(入養)하였다.>

 

4259 ; 1926년 병인(丙寅) 3월 4일 천수를 다할 때까지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80 평생을 수절(守節)하는 효열부로 이웃 마을까지 칭송이 자자하여 유림에서 효열부로 관아에 천거되었고,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에 실려 있다.

 

 

 

m03.png 효열부 여흥민씨(驪興閔氏)

 

 

효열부 여흥민씨는 문벌이 좋고 지체가 높은 가문의 후예인 영선공(泳先公)의 딸로 고종 1년 갑자(甲子 4197 ; 1864) 12월 25일에 탄생하였다.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곱게 곱게 자란 규수로 방년 18세가 되던 해 12월 27일 백당공의 13대손인 성(城)과 혼례를 올렸다. 옛날 풍속은 신부집에서 혼례를 마치고 2~3일 후에 신랑 혼자 본가로 가고 신부는 친정집에서 그대로 살다가, 1년 뒤에 시댁으로 가서 신랑과 함께 살게 되는데 이것을 우귀(于歸)라고 하였다.

 

여흥민씨도 혼례를 마치고 2~3일 후 신랑과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혼례를 치른 지 16일째 되던 날 천만 뜻밖에도 남편이 별세하였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즉시 흰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서 초상을 치르고 삼우(三虞)를 지낸 후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친정에서 1개월을 지내다가 “나는 이미 결혼을 하였으므로 시댁에 가서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며 남편도 없는 시댁으로 가서 시부모님을 모시며 세 식구가 살았다. 시부모 양위분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불행하게도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기에 이르렀다.

 

앞을 볼 수 없는 시부모님의 식사에서부터 대소변의 수발은 물론 좋은 약을 구하여 달이는 일 등, 여자 혼자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수십 년을 하루같이 조금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고 오직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하며 가정을 지켜 나갔다. 여흥 민씨의 효(孝)와 열(烈), 그리고 숭고한 희생정신은 백옥과 같이 정결하여 더욱 고아(高雅)하고, 그 순백의 하얀 마음은 수정과 같이 투명하여 더욱 청초하기만 하다.

 

기세(基世)로 입양하여 후사(後嗣)로 삼았고, 4256 ; 1923년 계해(癸亥) 1월 16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0세이다. 향당과 이웃마을에서 장한 효열부라 칭송을 아끼지 아니하였고, 향교와 유림의 많은 선비가 연명으로 천장(薦狀)을 작성하여 고을에 올려 그 효열(孝烈)을 찬양(讚揚)하였다.

 

 

 

m03.png 효열부 창녕성씨(昌寧成氏)

 

 

자고(自古)로 충효열(忠孝烈)은 국가의 대전(大典)이요, 우리 겨레가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왔던 인륜의 도리이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충효열의 이 덕목만은 변함없이 우리 민족의 당연한 도리로 여겨왔다.

 

본군 향리에서 추앙 받는 유인 창녕성씨는 문숙공(文肅公) 석용(石瑢)의 후손인 선비 금환(錦煥)의 딸로 고종 4년 정묘(丁卯 4200 : 1867) 12월 22일 탄생하니,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유하고 지행(志行)이 유한 정숙하였다.

장성하여 혼기에 이르니 가락국왕의 후예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군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에 승배(陞拜)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훈급에 올라 그 공적이 절의록(節義錄)과 충무전서(忠武全書)에 등재되어 있는 김해김공 휘 선지(銑之)의 10대손이며, 정조(正祖) 병오(丙午)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행 사간원 정언(行司諫院正言)을 역임하신 휘(諱) 재일(載一)(號) 묵헌(黙軒)공의 현손인 기추공(基秋公)과 혼례를 치른 지 겨우 수개월 후 우귀(于歸)하기도 전에 부군의 상을 당하니, 애통함을 금하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부군의 뒤를 따라 자결하려 하였으나 마음을 돌려 내 몸에 유혈 재복(遺血在腹)하니 내 어찌 자결하리오. 이렇게 개오(改悟)하고 몇 개월 후 천행으로 득남(得男)하니, 오직 유복자의 양육과 편고(偏姑)의 봉양 그리고 조상의 봉사(奉祀)에 온갖 정성을 다하며 평생 수절하여 인륜지도를 지킬 것을 굳게 작심하였다. 그러나 가세가 빈곤하여 길쌈으로 가업을 삼으며 편고 봉양에 극진한 효성을 다하니, 향당(鄕黨)과 인리(隣里)에서 그의 효열을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아들 영택(英鐸) 또한 어머니의 곧은 성품과 순결한 지조 그리고 효행을 본받아 편모를 섬기는 데 조석으로 문안하며 지극 정성을 다하여, 언제나 가정이 화목하였으 모든 세인들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장하도다. 창녕성씨의 효와 열이여 ! 재행하기도 전에 청상의 몸으로 60평생 정절을 지키며 장부가 해야 할 일을 역행하면서 삼종지의를 행하고 인륜의 근본 도리를 몸소 실천한 효열이야 말로 동서고금에 보기 드문 효열의 표상이 되고 세인들의 귀감이 되므로 전남도지(全南道誌)와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에 등재되었다.

4261 : 1928 무진(戊辰) 11월 16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2세이다. 이 탁관(卓冠)의 출천지효열은 백세 귀감이 되어 혼탁한 현대 사회에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일월과 같이 영원토록 찬연히 빛나리라.

단기 4334년 서기 2001년 신사(辛巳) 3월 일 衡 根 謹 識

 

 

 

m03.png 효열부 경주최씨(慶州崔氏)

 

 

효열부 경주최씨는 선비인 상영(祥榮)의 딸로 고종 37년 경자(庚子 4233 : 1900) 11월 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굳은 성품과 순결한 지조가 있었고, 명문 가정에서 받은 교육에 힘입어 매사에 예의와 법도가 있으며 정숙하였다.

 

백당공의 15대손이 되는 상택(商鐸)과 결혼하여 시부모를 받들어 모심에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를 다하였고, 남편을 받듦에도 공경을 다하였다. 남편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질병이 있었는데, 어느 의원(醫員)이 하는 말이 “한 밤중에 길은 물을 100일 동안 먹으면 병을 낳을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뒤부터는 한 밤중에 목욕재계하고 물을 길어오며 단을 쌓아 치성을 드리기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그러던 중 하룻밤은 세찬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를 쳐서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칠흑같이 캄캄하였다.

 

그때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그치기를 기원하니, 하늘도 감동했는지 잠시 비가 그치고 천둥 번개도 조용하여 물을 길어 올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뱀을 잡아 달여 먹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는데, 마침 담장 아래에 큰 뱀이 서리고 있어 손으로 움켜잡으니, 뱀의 긴 꼬리가 팔과 몸을 휘감았지만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그 뱀을 달여서 남편이 복용하게 함으로써 효험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일의 전후 사정을 전하여 들은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뒷바라지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빈(永彬), 영배(永培) 두 아들과, 임경철(任炅哲)에 출가한 딸이 있다.>

4316 ; 1983 갑자(甲子) 11월 8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84세이다.

고금에 보기 드문 경주최씨의 뛰어난 행적이 호남 삼강록(湖南三綱錄)에 실려 있다.

 

 

 

m03.png 효열부 해남윤씨(海南尹氏)

 

 

효열부 해남윤씨는 선비인 재유(在由)의 딸로 고종 41년 갑진(甲辰 4241 ; 1904) 2월 15일에 탄생하였다.

18세에 백당공의 현손인 제남공(濟南公) 휘 선지(銑之)의 12대손이 되는 영철(泳喆)에게 출가하였으니,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여러 차례 자결(自決)을 하려 하였으나 가족과 이웃의 간곡한 위로와 만류를 뿌리치지 못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아니면 시부모 봉양과 여러 대의 많은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음으로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자기의 한 몸을 희생하려고 결심하였다. 가난한 살림으로 밤낮 없이 길쌈을 하기도 하고 남의 집의 일을 해 주는 품팔이를 하기도 하면서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여러 대의 많은 제사를 받드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한 장한 효행(孝行)과 뼈에 사무치고 가슴에 저려오는 외로움을 참아가면서 지킨 정절은 백옥보다도 더 순결하고 백합보다도 더 청초(淸楚)하여 그 숭고하고 고고(孤高)함을 어떤 말이나 어떤 문장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감탄하고 칭송만 할 따름이다. 조카 정근(玎根)으로 양자를 삼아 손자 둘을 두었으니, 모두가 효자(孝子)이며 효손(孝孫)이었다. 4313 ; 1976년 경신(庚申) 12월 17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73세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해도 인륜의 도리를 몸소 실천한 이 장한 행적이야말로 현대의 요즘 사회에서도 그 가치관이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흠모(欽慕)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이 되고 있다. 영원토록 많은 사람의 귀감(龜鑑)이 될, 이 해남윤씨의 효열(孝烈)이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와 해남군지(海南郡誌)에 실려 있다.

인륜의 도리를 몸소 실천한 효자와 효열부의 거룩한 행적은 요즘의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진하고 절대적이었다. 모든 행실의 근본이 된다는 효의 사상은 산업화의 현대 사회에서도 최고의 가치와 덕목으로 빛나고 있으므로, 선조의 효(孝)와 열(烈)을 본받아 실천하는데 우리 모두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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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장군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충절의 표상이 된 선조

문과에 급제한 선조

효성이 지극한 선조

장하신 효열부(孝烈婦)

 

 

17세~20세의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여 대를 이을 자식도 두지 못해 후사(後嗣)를 입양하기도 하였고 유복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정성을 다해 시부모 봉양과 종가의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한평생 정절을 지킨 효열부의 숭고한 효(孝)와 열(烈)이여!

 

 

m03.png 효열부(孝烈婦) 원주이씨(原州李氏) 기적비(紀績碑)

 

자고(自古)로 충(忠) · 효(孝) · 열(烈)은 국가의 대전(大典)이요, 우리 민족이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인륜의 도리이다.

향당과 온 고을에서 효열(孝烈)로 추앙 받는 유인 원주이씨는 강릉부사 (江陵府使) 휘 영화(英華)의 후손인 선비 기춘(基春)의 딸로 순조 16년 병자(丙子 4201 ; 1816) 11월 15일에 탄생하였으니,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유하고 지행(志行)이 유한정숙(幽閑貞淑)하였다.

 

방년 19세 때 여름,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원손이요 병자호란 때 진사로 호남의병장이었던 김해김공 휘 연지(鍊之)의 8대손 유성공(有聲公)과 혼례를 치른 지 겨우 10여일, 우귀(于歸)하기도 전인데 불행하게도 천만 뜻밖에 부군의 별세를 당하여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급기야는 부군의 뒤를 따라 수차 자결(自決)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을 잃고 의지할 데 없는 60노령인 시부모의 간곡한 설득과 주위 사람들의 절절한 위로에 감동되어, 차마 자결하지 못하고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예에 따라 3년 상을 마치고 평생 동안 흰옷을 입고 지내며 시부모 봉양과 종가의 사당 제사를 받드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가세가 곤궁함으로 길쌈으로 가업을 삼았고, 중년에 이르러 시부모의 6년 거상(居喪)에도 조석으로 상식하며 초상과 장례의 예법을 조금도 소홀히 함이 없었으며 슬퍼함이 지나쳐 몸이 몹시 쇠약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향당과 이웃마을에서 그의 효열(孝烈)을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만년에 종질 노혁(魯赫)으로 입양하여 대를 이었으니, 그 자여손(子與孫)들도 효도를 계승하고 모두가 인품이 성실하고 후덕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효손(孝子孝孫)이 끊이지 않으니 하늘이 큰복을 내려준다」 라는 말은 이 효열부 원주이씨를 이름이라 하겠다.

 

장하여라. 원주이씨의 효와 열이여 !

재행(再行)하기도 전에 청상의 과부가 되어 80평생 정절을 지키며 장부가 해야 할 온갖 일들을 힘써 행하면서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종가의 제사를 받들어 승선유후(承先裕後)하였다. 고종 32년 을미(乙未 4228 ; 1895) 5월 1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80세이다.

 

인륜의 근본 도리를 몸소 실천한 효열부 원주이씨는 고금에 보기 드문 효와 열부의 표상이 되어 온 천하의 규범이 되므로, 해남향교기(海南鄕校記)·삼강록(三綱錄) · 해남문헌집(海南文獻集)에 실려 있다. 이 탁관(卓冠)의 출천지효열(出天之孝烈)은 백세 귀감이 되어 일월과 같이 영원토록 찬연한 빛이 되리.

 

단기 4332 서기 1999 기묘(己卯) 4월 상한

해남향교(海南鄕校) 전전교(前典校)

남원인(南原人) 윤재진(尹在振) 근지(謹識)

 

 

 

m03.png 효열부 창녕조씨(昌寧曺氏)

 

효열부 창녕 조씨는 선비 병선(秉璇)의 딸로 헌종(憲宗) 8년 임인(壬寅 4172 : 1842) 8월 27일에 탄생하였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백당공의 15대손인 요택(堯鐸)에게 출가하였으니, 타고난 천성이 정숙하여 요조숙녀의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었다. 시부모에게 아침 저녁의 문안 인사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고, 가난한 살림이지만 음식 봉양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효부로 칭송을 받았다. 또한 동기간에 우애가 돈독함은 물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예의범절에도 조금의 소홀함이 없었다.

 

20세가 되던 해에 불행하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天崩之痛〕, 곧 남편을 여의는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그 슬픔을 가눌 길 없어 남편을 따라 자결(自決)을 하려 하였으나, 늙으신 시부모 양위분의 봉양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 차마 자결하지 못하고 모진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매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항상 부드럽고 상냥한 말씨와 환하게 웃는 고운 얼굴로 오직 시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함을 최우 으로 삼으며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35세 되던 해에 시어머니가 천수를 다하니 슬퍼함이 지나쳐 몸이 여위기에 이르렀고, 예에 따라 초상과 장례를 마치고 3년 동안 조석 상식을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밤낮 없이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해내야만 했고, 험난하고 고단한 삶을 극복하기 위하여 눈물과 외로움을 참아야만 하였다. <당질(堂姪) 영중(泳仲)을 입양(入養)하였다.>

 

4259 ; 1926년 병인(丙寅) 3월 4일 천수를 다할 때까지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80 평생을 수절(守節)하는 효열부로 이웃 마을까지 칭송이 자자하여 유림에서 효열부로 관아에 천거되었고,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에 실려 있다.

 

 

 

m03.png 효열부 여흥민씨(驪興閔氏)

 

효열부 여흥민씨는 문벌이 좋고 지체가 높은 가문의 후예인 영선공(泳先公)의 딸로 고종 1년 갑자(甲子 4197 ; 1864) 12월 25일에 탄생하였다.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곱게 곱게 자란 규수로 방년 18세가 되던 해 12월 27일 백당공의 13대손인 성(城)과 혼례를 올렸다. 옛날 풍속은 신부집에서 혼례를 마치고 2~3일 후에 신랑 혼자 본가로 가고 신부는 친정집에서 그대로 살다가, 1년 뒤에 시댁으로 가서 신랑과 함께 살게 되는데 이것을 우귀(于歸)라고 하였다.

 

여흥민씨도 혼례를 마치고 2~3일 후 신랑과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혼례를 치른 지 16일째 되던 날 천만 뜻밖에도 남편이 별세하였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즉시 흰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서 초상을 치르고 삼우(三虞)를 지낸 후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친정에서 1개월을 지내다가 “나는 이미 결혼을 하였으므로 시댁에 가서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며 남편도 없는 시댁으로 가서 시부모님을 모시며 세 식구가 살았다. 시부모 양위분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불행하게도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기에 이르렀다.

 

앞을 볼 수 없는 시부모님의 식사에서부터 대소변의 수발은 물론 좋은 약을 구하여 달이는 일 등, 여자 혼자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수십 년을 하루같이 조금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고 오직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하며 가정을 지켜 나갔다. 여흥 민씨의 효(孝)와 열(烈), 그리고 숭고한 희생정신은 백옥과 같이 정결하여 더욱 고아(高雅)하고, 그 순백의 하얀 마음은 수정과 같이 투명하여 더욱 청초하기만 하다.

 

기세(基世)로 입양하여 후사(後嗣)로 삼았고, 4256 ; 1923년 계해(癸亥) 1월 16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0세이다. 향당과 이웃마을에서 장한 효열부라 칭송을 아끼지 아니하였고, 향교와 유림의 많은 선비가 연명으로 천장(薦狀)을 작성하여 고을에 올려 그 효열(孝烈)을 찬양(讚揚)하였다.

 

 

 

m03.png 효열부 창녕성씨(昌寧成氏)

 

자고(自古)로 충효열(忠孝烈)은 국가의 대전(大典)이요, 우리 겨레가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왔던 인륜의 도리이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충효열의 이 덕목만은 변함없이 우리 민족의 당연한 도리로 여겨왔다.

 

본군 향리에서 추앙 받는 유인 창녕성씨는 문숙공(文肅公) 석용(石瑢)의 후손인 선비 금환(錦煥)의 딸로 고종 4년 정묘(丁卯 4200 : 1867) 12월 22일 탄생하니,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유하고 지행(志行)이 유한 정숙하였다.

장성하여 혼기에 이르니 가락국왕의 후예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군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에 승배(陞拜)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훈급에 올라 그 공적이 절의록(節義錄)과 충무전서(忠武全書)에 등재되어 있는 김해김공 휘 선지(銑之)의 10대손이며, 정조(正祖) 병오(丙午)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행 사간원 정언(行司諫院正言)을 역임하신 휘(諱) 재일(載一)(號) 묵헌(黙軒)공의 현손인 기추공(基秋公)과 혼례를 치른 지 겨우 수개월 후 우귀(于歸)하기도 전에 부군의 상을 당하니, 애통함을 금하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부군의 뒤를 따라 자결하려 하였으나 마음을 돌려 내 몸에 유혈 재복(遺血在腹)하니 내 어찌 자결하리오. 이렇게 개오(改悟)하고 몇 개월 후 천행으로 득남(得男)하니, 오직 유복자의 양육과 편고(偏姑)의 봉양 그리고 조상의 봉사(奉祀)에 온갖 정성을 다하며 평생 수절하여 인륜지도를 지킬 것을 굳게 작심하였다. 그러나 가세가 빈곤하여 길쌈으로 가업을 삼으며 편고 봉양에 극진한 효성을 다하니, 향당(鄕黨)과 인리(隣里)에서 그의 효열을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아들 영택(英鐸) 또한 어머니의 곧은 성품과 순결한 지조 그리고 효행을 본받아 편모를 섬기는 데 조석으로 문안하며 지극 정성을 다하여, 언제나 가정이 화목하였으 모든 세인들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장하도다. 창녕성씨의 효와 열이여 ! 재행하기도 전에 청상의 몸으로 60평생 정절을 지키며 장부가 해야 할 일을 역행하면서 삼종지의를 행하고 인륜의 근본 도리를 몸소 실천한 효열이야 말로 동서고금에 보기 드문 효열의 표상이 되고 세인들의 귀감이 되므로 전남도지(全南道誌)와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에 등재되었다.

4261 : 1928 무진(戊辰) 11월 16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2세이다. 이 탁관(卓冠)의 출천지효열은 백세 귀감이 되어 혼탁한 현대 사회에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일월과 같이 영원토록 찬연히 빛나리라.

단기 4334년 서기 2001년 신사(辛巳) 3월 일 衡 根 謹 識

 

 

 

m03.png 효열부 경주최씨(慶州崔氏)

 

효열부 경주최씨는 선비인 상영(祥榮)의 딸로 고종 37년 경자(庚子 4233 : 1900) 11월 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굳은 성품과 순결한 지조가 있었고, 명문 가정에서 받은 교육에 힘입어 매사에 예의와 법도가 있으며 정숙하였다.

 

백당공의 15대손이 되는 상택(商鐸)과 결혼하여 시부모를 받들어 모심에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를 다하였고, 남편을 받듦에도 공경을 다하였다. 남편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질병이 있었는데, 어느 의원(醫員)이 하는 말이 “한 밤중에 길은 물을 100일 동안 먹으면 병을 낳을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뒤부터는 한 밤중에 목욕재계하고 물을 길어오며 단을 쌓아 치성을 드리기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그러던 중 하룻밤은 세찬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를 쳐서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칠흑같이 캄캄하였다.

 

그때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그치기를 기원하니, 하늘도 감동했는지 잠시 비가 그치고 천둥 번개도 조용하여 물을 길어 올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뱀을 잡아 달여 먹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는데, 마침 담장 아래에 큰 뱀이 서리고 있어 손으로 움켜잡으니, 뱀의 긴 꼬리가 팔과 몸을 휘감았지만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그 뱀을 달여서 남편이 복용하게 함으로써 효험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일의 전후 사정을 전하여 들은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뒷바라지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빈(永彬), 영배(永培) 두 아들과, 임경철(任炅哲)에 출가한 딸이 있다.>

4316 ; 1983 갑자(甲子) 11월 8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84세이다.

고금에 보기 드문 경주최씨의 뛰어난 행적이 호남 삼강록(湖南三綱錄)에 실려 있다.

 

 

 

m03.png 효열부 해남윤씨(海南尹氏)

 

효열부 해남윤씨는 선비인 재유(在由)의 딸로 고종 41년 갑진(甲辰 4241 ; 1904) 2월 15일에 탄생하였다.

18세에 백당공의 현손인 제남공(濟南公) 휘 선지(銑之)의 12대손이 되는 영철(泳喆)에게 출가하였으니,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여러 차례 자결(自決)을 하려 하였으나 가족과 이웃의 간곡한 위로와 만류를 뿌리치지 못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아니면 시부모 봉양과 여러 대의 많은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음으로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자기의 한 몸을 희생하려고 결심하였다. 가난한 살림으로 밤낮 없이 길쌈을 하기도 하고 남의 집의 일을 해 주는 품팔이를 하기도 하면서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여러 대의 많은 제사를 받드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한 장한 효행(孝行)과 뼈에 사무치고 가슴에 저려오는 외로움을 참아가면서 지킨 정절은 백옥보다도 더 순결하고 백합보다도 더 청초(淸楚)하여 그 숭고하고 고고(孤高)함을 어떤 말이나 어떤 문장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감탄하고 칭송만 할 따름이다. 조카 정근(玎根)으로 양자를 삼아 손자 둘을 두었으니, 모두가 효자(孝子)이며 효손(孝孫)이었다. 4313 ; 1976년 경신(庚申) 12월 17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73세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해도 인륜의 도리를 몸소 실천한 이 장한 행적이야말로 현대의 요즘 사회에서도 그 가치관이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흠모(欽慕)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이 되고 있다. 영원토록 많은 사람의 귀감(龜鑑)이 될, 이 해남윤씨의 효열(孝烈)이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와 해남군지(海南郡誌)에 실려 있다.

인륜의 도리를 몸소 실천한 효자와 효열부의 거룩한 행적은 요즘의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진하고 절대적이었다. 모든 행실의 근본이 된다는 효의 사상은 산업화의 현대 사회에서도 최고의 가치와 덕목으로 빛나고 있으므로, 선조의 효(孝)와 열(烈)을 본받아 실천하는데 우리 모두 앞장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