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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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장군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충절의 표상이 된 선조

문과에 급제한 선조

효성이 지극한 선조

장하신 효열부(孝烈婦)

 

 

노송의 그늘에서 시를 읊고요   대숲을 거닐면서 노래도 했죠

긴긴밤 지새우며 책을 읽고요   허기를 참아가며 꿈을 키웠죠

금방에 이름 석자 걸리던 그날  서광이 비쳤어요 우리 가문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으심이여    더없이 드높고 크기만 하여라

《 금방(金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거는 방.》

 

 

m03.png 묵헌공(黙軒公) 행장(行狀)

 

 

공의 휘는 재일(載一)이요 자는 여현(汝賢)이요 호는 묵헌(黙軒)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65대손이다.

17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10대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창오(昌五)요, 모(母)는 순천김씨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윤태(潤泰)의 딸이다.

 

공은 영조(英祖) 25년 기사(己巳 4082 ; 1749) 8월 20일 탄생하였다. 타고난 외모가 준수하고 재지가 영특함은 물론 효행이 극진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학업에 전념하여 15세에 4서 3경을 모두 통독하였으며 경의에 정통하고 시문과 저술도 출중하여 과거(科擧)를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친상(親喪)을 당하여 벼슬을 한다 하여도 그 영화를 어버이에게 드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과거를 보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부(伯父)의 간곡한 권유로 정조 10년 병오(丙午 4119 ; 1786) 37세로 춘당대 전시(春塘臺 殿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정조 11년 4120 ; 1787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일 때 김유기(金裕己)는 청선(淸選) 에 부당하여 끝까지 권점(圈點)을 않으며 초사(初仕)부터 강직함을 굽히지 않았음.

12년 4121 ; 1788 휘릉 별검(徽陵別檢).

14년 4123 ; 1790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15년 4124 ; 1791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이어 예조 좌랑(禮曹佐郞), 다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16년 4125 ; 1792 죄 없이 인천(仁川)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옴.

18년 4127 ; 1794 종친부 주부(宗親簿 主簿), 이어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19년 4128 ; 1795 병조 좌랑(兵曹佐郞).

21년 4130 ; 1797 함경도 도사(咸鏡道 都事).

24년 4133 ; 1800 일청재공(一聽齋公)과 창의사(倡義祠) 세움.

순조 1년 4134 ; 1801 자여도 찰방(自如道 察訪).

  7년 4140 ; 1807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9년 4142 ; 1809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이조 좌랑(吏曹佐郞).

10년 4153 ; 1810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3차에 걸쳐 8가지 병폐를 상소하였으니, 그 명료한 문장이 고금에 보기 드문 걸작이다.

 

순조 17년 정축(丁丑 4150 ; 1817) 7월 11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9세이다.

묘는 해남군 황산면 입암(笠巖) 안산하(案山下) 손좌(巽坐)에 합폄이다.

배는 숙인(淑人)으로 승평김씨(昇平金氏) 이현(以鉉)의 딸로 1남 4녀를 두었으니, 1남은 상호(尙灝)요, 4녀는 임일재(任馹材) · 이진수(李晉秀) · 최제헌(崔濟憲) · 양제권(梁濟權)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승문원(承文院)과 사헌부(司憲府)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곧고 바른 도리와 공명정대한 대의를 실천하려 노력했던 행적들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4차례나 실려 있고, 28년간 진솔하고 자세하게 쓴 재관일기(在官日記)는 그 당시의 정치 문물과 풍속 재해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사료(史料)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m03.png 일청재공(一聽齋公) 행장(行狀)

 

 

공의 휘는 낙일(洛一)이요 자는 성연(聖演)이요 호는 일청재(一聽齋)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65대손이다.

 

17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10대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는 덕오(德五)요, 모(母)는 함양박씨(咸陽朴氏) 창후(昌垕)의 딸이다.

 

공은 영조(英祖) 26년 경오(庚午 4083 ; 1750) 4월 15일 탄생하여 계부(季父)인 달오(達五)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고 우애가 돈독함은 물론 타고난 재주 또한 영특하였다.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학업에 열중하여 15세에 7서를 모두 독파하였고, 학문과 저술 등의 재예(才藝)가 일취월장하여 16세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정조 7년 계묘(癸卯 4116 ; 1783) 겨울 33세에 식년(式年) 을과(乙科)에 제 2인자로 급제하였다.

 

정조  8년 4117 ; 1784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로 입직(入直)할 때 외국 사신을 상대하 는데 문자의 해박함이 모든 당상당하관보다 돋보였다.

12년 4121 ; 1788 순강원 수봉관(順康園 守奉官).

14년 4123 ; 1790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15년 4124 ; 1791 익릉영(翼陵令).

17년 4126 ; 1793 5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8월에 병조 좌랑(兵曹佐郞), 9월에 임 금 친림하의 춘당대(春塘臺) 시회에서 1등을 하여 길들여진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12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그 이튿날 예 조정랑(禮曹正郞)으로 승급되었다.

19년 4128 ; 1795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

21년 4130 ; 1797 예조 정랑(禮曹正郞).

22년 4131 ; 1798 창릉령(昌陵令), 2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 12월에자여도(自 如道 : 지금의 창원(昌原) 찰방에 부임하여 우정(郵政)의 폐단을 없애고 바로 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송덕비를 세워 기림.

24년 4133 ; 1800 묵헌공(黙軒公)과 창의사(倡義祠) 세움.

순조  3년 4136 ; 1803 4월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12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 監察).

 4년 4137 ; 1804 금천도 찰방(金泉道 察訪).

순조 8년 무진(戊辰 4141 ; 1808) 4월 17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59세이다.

 

묘는 마산면 원항촌 매영산(埋英山) 선영하 유좌(酉坐)이다.

배는 숙인(淑人)으로 창녕 조씨(昌寧曺氏) 정후(廷垕)의 딸로 일찍 세상을 떠나 소생이 없고, 계배는 해남윤씨(海南尹氏) 대준(大俊)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으니, 3남은 인범(仁範) · 의범(義範) · 예범(禮範)이요, 2녀는 박종규(朴宗奎) · 박재곤(朴載坤)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높은 학문은 주옥같이 아름다운 문묵(文墨)으로 남아 그 향기 더욱 그윽하고, 외직(外職)으로 있을 때의 인자하고 후덕한 명망(名望)은 송덕비로 칭송되어 왔으며, 청렴결백한 성품은 청족(淸族)의 가풍을 계승하는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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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장군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충절의 표상이 된 선조

문과에 급제한 선조

효성이 지극한 선조

장하신 효열부(孝烈婦)

 

 

노송의 그늘에서 시를 읊고요   대숲을 거닐면서 노래도 했죠

긴긴밤 지새우며 책을 읽고요   허기를 참아가며 꿈을 키웠죠

금방에 이름 석자 걸리던 그날  서광이 비쳤어요 우리 가문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으심이여    더없이 드높고 크기만 하여라

《 금방(金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거는 방.》

 

 

m03.png 묵헌공(黙軒公) 행장(行狀)

 

공의 휘는 재일(載一)이요 자는 여현(汝賢)이요 호는 묵헌(黙軒)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65대손이다.

17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10대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창오(昌五)요, 모(母)는 순천김씨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윤태(潤泰)의 딸이다.

 

공은 영조(英祖) 25년 기사(己巳 4082 ; 1749) 8월 20일 탄생하였다. 타고난 외모가 준수하고 재지가 영특함은 물론 효행이 극진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학업에 전념하여 15세에 4서 3경을 모두 통독하였으며 경의에 정통하고 시문과 저술도 출중하여 과거(科擧)를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친상(親喪)을 당하여 벼슬을 한다 하여도 그 영화를 어버이에게 드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과거를 보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부(伯父)의 간곡한 권유로 정조 10년 병오(丙午 4119 ; 1786) 37세로 춘당대 전시(春塘臺 殿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정조 11년 4120 ; 1787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일 때 김유기(金裕己)는 청선(淸選) 에 부당하여 끝까지 권점(圈點)을 않으며 초사(初仕)부터 강직함을 굽히지 않았음.

12년 4121 ; 1788 휘릉 별검(徽陵別檢).

14년 4123 ; 1790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15년 4124 ; 1791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이어 예조 좌랑(禮曹佐郞), 다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16년 4125 ; 1792 죄 없이 인천(仁川)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옴.

18년 4127 ; 1794 종친부 주부(宗親簿 主簿), 이어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19년 4128 ; 1795 병조 좌랑(兵曹佐郞).

21년 4130 ; 1797 함경도 도사(咸鏡道 都事).

24년 4133 ; 1800 일청재공(一聽齋公)과 창의사(倡義祠) 세움.

순조 1년 4134 ; 1801 자여도 찰방(自如道 察訪).

  7년 4140 ; 1807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9년 4142 ; 1809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이조 좌랑(吏曹佐郞).

10년 4153 ; 1810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3차에 걸쳐 8가지 병폐를 상소하였으니, 그 명료한 문장이 고금에 보기 드문 걸작이다.

 

순조 17년 정축(丁丑 4150 ; 1817) 7월 11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9세이다.

묘는 해남군 황산면 입암(笠巖) 안산하(案山下) 손좌(巽坐)에 합폄이다.

배는 숙인(淑人)으로 승평김씨(昇平金氏) 이현(以鉉)의 딸로 1남 4녀를 두었으니, 1남은 상호(尙灝)요, 4녀는 임일재(任馹材) · 이진수(李晉秀) · 최제헌(崔濟憲) · 양제권(梁濟權)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승문원(承文院)과 사헌부(司憲府)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곧고 바른 도리와 공명정대한 대의를 실천하려 노력했던 행적들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4차례나 실려 있고, 28년간 진솔하고 자세하게 쓴 재관일기(在官日記)는 그 당시의 정치 문물과 풍속 재해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사료(史料)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m03.png 일청재공(一聽齋公) 행장(行狀)

 

공의 휘는 낙일(洛一)이요 자는 성연(聖演)이요 호는 일청재(一聽齋)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65대손이다.

 

17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10대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는 덕오(德五)요, 모(母)는 함양박씨(咸陽朴氏) 창후(昌垕)의 딸이다.

 

공은 영조(英祖) 26년 경오(庚午 4083 ; 1750) 4월 15일 탄생하여 계부(季父)인 달오(達五)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고 우애가 돈독함은 물론 타고난 재주 또한 영특하였다.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학업에 열중하여 15세에 7서를 모두 독파하였고, 학문과 저술 등의 재예(才藝)가 일취월장하여 16세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정조 7년 계묘(癸卯 4116 ; 1783) 겨울 33세에 식년(式年) 을과(乙科)에 제 2인자로 급제하였다.

 

정조  8년 4117 ; 1784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로 입직(入直)할 때 외국 사신을 상대하 는데 문자의 해박함이 모든 당상당하관보다 돋보였다.

12년 4121 ; 1788 순강원 수봉관(順康園 守奉官).

14년 4123 ; 1790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15년 4124 ; 1791 익릉영(翼陵令).

17년 4126 ; 1793 5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8월에 병조 좌랑(兵曹佐郞), 9월에 임 금 친림하의 춘당대(春塘臺) 시회에서 1등을 하여 길들여진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12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그 이튿날 예 조정랑(禮曹正郞)으로 승급되었다.

19년 4128 ; 1795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

21년 4130 ; 1797 예조 정랑(禮曹正郞).

22년 4131 ; 1798 창릉령(昌陵令), 2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 12월에자여도(自 如道 : 지금의 창원(昌原) 찰방에 부임하여 우정(郵政)의 폐단을 없애고 바로 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송덕비를 세워 기림.

24년 4133 ; 1800 묵헌공(黙軒公)과 창의사(倡義祠) 세움.

순조  3년 4136 ; 1803 4월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12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 監察).

 4년 4137 ; 1804 금천도 찰방(金泉道 察訪).

순조 8년 무진(戊辰4141 ; 1808)

      4월 17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59세이다.

 

묘는 마산면 원항촌 매영산(埋英山) 선영하 유좌(酉坐)이다.

배는 숙인(淑人)으로 창녕 조씨(昌寧曺氏) 정후(廷垕)의 딸로 일찍 세상을 떠나 소생이 없고, 계배는 해남윤씨(海南尹氏) 대준(大俊)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으니, 3남은 인범(仁範) · 의범(義範) · 예범(禮範)이요, 2녀는 박종규(朴宗奎) · 박재곤(朴載坤)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높은 학문은 주옥같이 아름다운 문묵(文墨)으로 남아 그 향기 더욱 그윽하고, 외직(外職)으로 있을 때의 인자하고 후덕한 명망(名望)은 송덕비로 칭송되어 왔으며, 청렴결백한 성품은 청족(淸族)의 가풍을 계승하는 표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