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疾風知勁草 : 세찬 바람이 불 때 억센 풀을 알고,
板蕩識忠臣 :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신을 앎.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고,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충의사(忠義士) 네 분의 위대한 발자취는 청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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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공(岡西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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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자는 응시(應時)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8대손이다. 10대조인 중조(中祖)의 휘는 관(管)이요 자는 희범(希範)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니,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판도판서 좌사의대부 국자사부(版圖判書 左司議大夫 國子師傅)로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입향조인
증조의 휘는 하(河)요 초휘(初諱)는 대성(大成)이요 자는 경호(景浩)요, 호는 백당(白棠)이니, 선무랑(宣務郞)에 증직되었다. 어렸을 때 연산(燕山) 무오사화(戊午士禍 3831 ; 1498)를 피하여 경상도 청도에서 유모 신씨의 등에 업혀 남원·광주를 거쳐 해남으로 내려와 잠시 피신하려다가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부(父)의 휘는 연수(延壽)이니, 행 후릉 참봉(行 厚陵參奉)이요, 모(母)는 유인(孺人)으로 해남윤씨(海南尹氏) 연(衍)의
딸이다. 공은 명종(明宗) 8년 계축(癸丑 3886 ; 1553) 11월 12일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온순하고 자질이 뛰어남은 물론 학문을 좋아하여 조헌(趙憲) 선생 문하에 들어가 경학에 전력하였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안방준(安邦俊) · 백진남(白振南)과 우의가 돈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조헌(趙憲) · 변응정(邊應井) · 고경명(高敬命)과 합세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선조 30년 (3930 ; 1597) 정유재란 때는
종제인
지촌공(智村公)과 사우(士友)인 백진남(白振南) · 김성원(金聲遠) · 문영개(文英凱) · 김택남(金澤南) 등 10여 사람이 협심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어선 수십척을 동원하여 군선으로 가장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아군의 세력을 과시하였고, 한편으로는 군량과 군수품을 조달하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루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선조(宣祖) 38년 을사(乙巳 3938 ; 160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광해군(光海君) 4년 임자(壬子
3945
; 1612) 충의와 효행으로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인조조(仁祖朝) 때는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특배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도 종제 지촌공 · 차자 송은공(松隱公)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다. 인조 16년 무인(戊寅 3971 ; 1638) 6월 30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86세이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호산(葫山) 선영하 묘좌(卯坐)에 쌍분이니, 광주김씨는 좌측에 있고 도강김씨는 부좌(祔左)이다.
배는 공인(恭人)으로 광주김씨 부장(部將) 필구(泌銶)의 딸이니 4남 3녀를 낳았고, 계배는 유인(孺人)으로 도강김씨 홍우(弘佑)의 딸이다. 장자 선지(銑之)의 호는 제남(濟南)이니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차자 연지(鍊之)의 호는 송은(松隱)이니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3자 정지(鋥之)의 호는 송헌(松軒)으로 당숙 안우(安宇)에게 입양되었고,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通政大夫 折衝將軍 龍驤衛 副護軍)에 증직되었다.
4자 여지(麗之)의 호는 연촌(蓮村)으로 학문이 높고 문장에 능하였다. 3녀는 이경립(李慶立) · 민사안(閔思顔) · 임택(林擇)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7대손 재일(載一)은 문과에 입격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요, 낙일(洛一)은 문과에 입격한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
지촌공(智村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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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안우(安宇)요 자는 화국(華國)이요 호는 지촌(智村)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8대손이다.
10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증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 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연년(延年)이요, 모(母)는 이천서씨(利川徐氏) 직장(直長) 준(峻)의 딸이다.
공은 명종(明宗) 9년 갑인(甲寅 3887 ; 1554) 1월 17일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재지가 영특하여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함으로 일찍이 문예를 성취하였다.
선조 30년 정유재란 (3930 ; 1597) 때는 강서공(岡西公) · 백진남(白振南) · 김성원(金聲遠) 등 10여 사람이 합심하여 어선 수십 척을 동원하여 바다를 가로질러서 후진(後陣)의 군선인 것처럼 가장하여 아군의 군사력을 과장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군량과 군수품을 실어 나르기도 하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루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조 33년 경자(庚子
3933 ; 1600)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인조 2년 갑자(甲子 3957 ; 1624)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도 의병을 일으켜 소모사(召募使) 김장생의 막하로 가니, 김장생이 기뻐하며 가상해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강서공(岡西公) · 송은공(松隱公)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곧 모의청을 설치하고 친족 친우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고금을 통하여 같은 이치이니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어떻게 촌각을 지체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가재 도구를 팔아 군수품을 마련하고 또 수집하니, 군량이 60석이요, 화살이 40부(部)요, 장창이 40자루요, 콩이 4석이요, 말이 12필이요, 베가 30필이나 되었다. 같은 고을의 윤적(尹績) · 민사안(閔思顔) 등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여산(礪山)에 모였는데,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을 금하지 못하며 통곡하였다. 이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감회를 5언 절구의 시로 나타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含淚望北極 : 눈물을 머금고 북쪽을 바라보니
何處是皇明 : 아! 우리 임금은 어디 계시는가?
歸來訪舊址 : 발길 돌려 서호의 옛터로 돌아와
願言報崇禎 : 치욕의 원한 갚기만을 기원하노라
그 뒤로는 서호(西湖)의 노송정(老松亭)에서 산수를 즐기며 살아가다가 인조 12년 갑술(甲戌 3969 ; 1664) 7월 2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 82세이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산이면 유동리 상공산(相公山) 선영하에 쌍분이다. 배는 유인(孺人)으로 장흥임씨(長興林氏) 자영(自榮)의 딸이니, 당질 정지(鋥之)로 입양하였다.
제남공(濟南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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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선지(銑之)요 자는 여휘(汝輝)요 호는 제남(濟南)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9대손이다.
11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고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노송사(老松祠)에 배향되었다. 모(母)는 공인(恭人)으로 광주김씨(光州金氏) 부장(部將) 필구(泌銶)의 딸이요, 계비는 유인(孺人)으로 도강김씨(道康金氏) 홍우(弘佑)의 딸이다. 공은 선조(宣祖) 3년 경오(庚午 3903 ; 1570) 정월 10일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남다르고 기국과 도량이 비범함은 물론 무예 또한 출중하여 선조 21년 무자(戊子 3921 ; 1588) 약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를 거쳐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조의 의주 파천(播遷)에 호종(扈從)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지혜와 용맹을 모두 겸비하여 남방의 요충지를 방어할 만하다는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의 추천으로 곡포 만호(曲浦萬戶)에 제수되어 군함과 군비를 정비하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 정운(鄭運) ·
어영담(魚泳潭) · 배흥립(裵興立) · 김완(金浣) · 신호(申浩) 등의 장군과 함께 한산(閑山) · 사천(泗川) · 부산(釜山) · 제포(薺浦) · 당포(唐浦)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선조 28년 을미(乙未 3928 ; 1592) 병절교위 용양위 좌부장(秉節校尉 龍驤衛 左部將)과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의 혁혁한 전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에 특배되었으나 부임도 못한 채 동년 12월
27일 노량해전에서
아깝게 전몰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28세이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의 훈급에 올랐고 철권(鐵券)을 하사 받았으니, 공의 행적이 절의록(節義錄)과 충무전서(忠武全書)에 실려 있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해남 서쪽 산이면 고림치(古林峙) 해좌(亥坐)에 쌍분이다.
배는 영인(令人)으로 광산김씨 천추(千秋)의 딸로 1남을 두었으니 근최(勤最)이다. 6대손인 재일(載一)과 낙일(洛一)이 정조조(正祖朝) 때 문과에 입격하였으니, 재일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이르렀고, 낙일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다.
송은공(松隱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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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연지(鍊之)요 자는 정숙(精叔)이요 호는 송은(松隱)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9대손이다.
11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고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노송사(老松祠)에 배향되었다. 모(母)는 공인(恭人)으로 광주김씨(光州金氏) 부장(部將)
필구(泌銶)의 딸이요, 계비는 유인(孺人)으로 도강김씨(道康金氏) 홍우(弘佑)의 딸이다.
공은 선조 10년 정축(丁丑 3910 ; 1577) 5월 17일 탄생하였으니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행이 극진하였다. 아버지의 중병에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목에 넘겨 3일을 더 연명하게 하였고, 어머니의 상에도 상장(喪葬)의 예를 다함은 물론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광해군(光海君) 7년 을묘(乙卯 3948 ; 161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인조 8년 경오(庚午 3963 ; 1630)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인조의 특별 포상으로 소학(小學) 1질을 하사 받아 지금까지 문보(門寶)로 전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여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가친 강서공(岡西公)과 함께 노천에
짚자리를 깔고 부자가 서로 바라보며 통곡하면서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진충보국(盡忠報國)할 것을 맹세하였다. 즉시 종숙 지촌공(智村公)과 함께 모의청을 설치한 후 가재도구을 팔아 군량과 군비를 마련하여 윤적(尹績) · 윤선계(尹善繼)와 함께 의병 300여명을 규합하여 나주(羅州)에 이르니,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㶿) · 대동찰방(大同察訪) 이기발(李起浡) · 순창군수(淳昌郡守) 최온(崔蘊) · 전한림(前翰林) 양만용(梁曼容)
· 전찰방(前察訪)
유집(柳緝) 등 5사람과 의병들이 도착하여 있었다.
공은 본현의 도유사 및 호남 의병장이 되어 여산(礪山)에 이르러 소모사 (召募使)인 기암 정홍명(畸庵 鄭泓溟)과 합세하여 청주까지 출전하였으나, 뜻밖에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접하고 통분을 금하지 못하여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였다. 끝까지 절의를 지키고자 소나무를 심어 당호(堂號)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하고,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서 자리의 오른쪽에 걸어놓고 지절(志節)을 지키려 하였다.
존주록(尊周錄)과 호남 창의록에 실린 공의 절의를 김원행(金元行)은 “일월(日月)과 그 빛을 겨룰 만하다” 하였고, 송환기(宋煥箕)는 “종묘사직을 보존하려는 충의라” 하였다. 조정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두문불출하다가 인조(仁祖) 19년 신사(辛巳 3974 ; 1641) 8월 8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5세이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황산면 연호리 발우산(鉢盂山) 간좌(艮坐)에 쌍분이다.
배는 유인(孺人)으로 장흥임씨(長興林氏) 진영(振榮)의 딸로 4남 2녀를 두었으니, 4남은 여최(勵最) · 훈최(勛最) · 공최(功最) · 권최(勸最)요, 2녀는 민호(閔浩) · 이계담(李繼聃)에게 출가하였다.
송은공 둔세시(松隱公 遯世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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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운 (原韻) 〉
皇明日月暗風沙 : 나라의 해와 달이 풍진에 어두워지니
擊劍中宵慷慨多 : 칼을 치는 이 한밤 슬픔만이 복받치네
白首孤臣安所適 : 늙고 외로운 신하 가야 할 곳 어드메뇨?
湖山一路向南斜 : 호남으로 가는 큰 길 남쪽으로 비껴 있네
謹次 遯世韻 (삼가 둔세시의 운자로 지음)
四先志節掃胡沙 : 네 분 선조의 충절 호란을 평정코져
天地綱常萬古多 : 천지간에 삼강 오륜 영원히 이어가리
遺蹟至今何處在 : 남긴 자취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皇明日月老松斜 : 나라의 해와 달은 노송에 비껴 있네
정조 24년 경신(庚申 4133 ; 1800) 6월 상순
6대손 행(行) 예조정랑(禮曹正郞) 낙일(洛一) 근지(謹識)
狂風吹月漲胡沙 : 오랑캐가 밀려와서 호란을 일으키니
罔夜驅馳募義多 : 밤새도록 바삐 뛰며 의병을 모집하오
遺蹟千年松不老 : 남긴 자취 영원하여 소나무는 늙지 않고
皇明雨露翠陰斜 : 자연의 은택으로 푸르름만 더하누나
정조 24년 경신(庚申 4133 ; 1800) 6월 상순
6대손 행(行)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재일(載一) 근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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疾風知勁草 : 세찬 바람이 불 때 억센 풀을 알고,
板蕩識忠臣 :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신을 앎.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고,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충의사(忠義士) 네 분의 위대한 발자취는 청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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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공(岡西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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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자는 응시(應時)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8대손이다. 10대조인 중조(中祖)의 휘는 관(管)이요 자는 희범(希範)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니,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판도판서 좌사의대부 국자사부(版圖判書 左司議大夫 國子師傅)로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입향조인
증조의 휘는 하(河)요 초휘(初諱)는 대성(大成)이요 자는 경호(景浩)요, 호는 백당(白棠)이니, 선무랑(宣務郞)에 증직되었다. 어렸을 때 연산(燕山) 무오사화(戊午士禍 3831 ; 1498)를 피하여 경상도 청도에서 유모 신씨의 등에 업혀 남원·광주를 거쳐 해남으로 내려와 잠시 피신하려다가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부(父)의 휘는 연수(延壽)이니, 행 후릉 참봉(行 厚陵參奉)이요, 모(母)는 유인(孺人)으로 해남윤씨(海南尹氏) 연(衍)의
딸이다. 공은 명종(明宗) 8년 계축(癸丑 3886 ; 1553) 11월 12일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온순하고 자질이 뛰어남은 물론 학문을 좋아하여 조헌(趙憲) 선생 문하에 들어가 경학에 전력하였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안방준(安邦俊) · 백진남(白振南)과 우의가 돈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조헌(趙憲) · 변응정(邊應井) · 고경명(高敬命)과 합세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선조 30년 (3930 ; 1597) 정유재란 때는
종제인
지촌공(智村公)과 사우(士友)인 백진남(白振南) · 김성원(金聲遠) · 문영개(文英凱) · 김택남(金澤南) 등 10여 사람이 협심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어선 수십척을 동원하여 군선으로 가장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아군의 세력을 과시하였고, 한편으로는 군량과 군수품을 조달하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루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선조(宣祖) 38년 을사(乙巳 3938 ; 160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광해군(光海君) 4년 임자(壬子
3945
; 1612) 충의와 효행으로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인조조(仁祖朝) 때는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특배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도 종제 지촌공 · 차자 송은공(松隱公)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다. 인조 16년 무인(戊寅 3971 ; 1638) 6월 30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86세이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호산(葫山) 선영하 묘좌(卯坐)에 쌍분이니, 광주김씨는 좌측에 있고 도강김씨는 부좌(祔左)이다.
배는 공인(恭人)으로 광주김씨 부장(部將) 필구(泌銶)의 딸이니 4남 3녀를 낳았고, 계배는 유인(孺人)으로 도강김씨 홍우(弘佑)의 딸이다. 장자 선지(銑之)의 호는 제남(濟南)이니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차자 연지(鍊之)의 호는 송은(松隱)이니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3자 정지(鋥之)의 호는 송헌(松軒)으로 당숙 안우(安宇)에게 입양되었고,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通政大夫 折衝將軍 龍驤衛 副護軍)에 증직되었다.
4자 여지(麗之)의 호는 연촌(蓮村)으로 학문이 높고 문장에 능하였다. 3녀는 이경립(李慶立) · 민사안(閔思顔) · 임택(林擇)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7대손 재일(載一)은 문과에 입격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요, 낙일(洛一)은 문과에 입격한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
지촌공(智村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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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안우(安宇)요 자는 화국(華國)이요 호는 지촌(智村)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8대손이다.
10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증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 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연년(延年)이요, 모(母)는 이천서씨(利川徐氏) 직장(直長) 준(峻)의 딸이다.
공은 명종(明宗) 9년 갑인(甲寅 3887 ; 1554) 1월 17일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재지가 영특하여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함으로 일찍이 문예를 성취하였다.
선조 30년 정유재란 (3930 ; 1597) 때는 강서공(岡西公) · 백진남(白振南) · 김성원(金聲遠) 등 10여 사람이 합심하여 어선 수십 척을 동원하여 바다를 가로질러서 후진(後陣)의 군선인 것처럼 가장하여 아군의 군사력을 과장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군량과 군수품을 실어 나르기도 하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루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조 33년 경자(庚子
3933 ; 1600)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인조 2년 갑자(甲子 3957 ; 1624)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도 의병을 일으켜 소모사(召募使) 김장생의 막하로 가니, 김장생이 기뻐하며 가상해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강서공(岡西公) · 송은공(松隱公)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곧 모의청을 설치하고 친족 친우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고금을 통하여 같은 이치이니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어떻게 촌각을 지체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가재 도구를 팔아 군수품을 마련하고 또 수집하니, 군량이 60석이요, 화살이 40부(部)요, 장창이 40자루요, 콩이 4석이요, 말이 12필이요, 베가 30필이나 되었다. 같은 고을의 윤적(尹績) · 민사안(閔思顔) 등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여산(礪山)에 모였는데,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을 금하지 못하며 통곡하였다. 이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감회를 5언 절구의 시로 나타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含淚望北極 : 눈물을 머금고 북쪽을 바라보니
何處是皇明 : 아! 우리 임금은 어디 계시는가?
歸來訪舊址 : 발길 돌려 서호의 옛터로 돌아와
願言報崇禎 : 치욕의 원한 갚기만을 기원하노라
그 뒤로는 서호(西湖)의 노송정(老松亭)에서 산수를 즐기며 살아가다가 인조 12년 갑술(甲戌 3969 ; 1664) 7월 2일 천수를 다하니 향년 82세이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산이면 유동리 상공산(相公山) 선영하에 쌍분이다. 배는 유인(孺人)으로 장흥임씨(長興林氏) 자영(自榮)의 딸이니, 당질 정지(鋥之)로 입양하였다.
제남공(濟南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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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선지(銑之)요 자는 여휘(汝輝)요 호는 제남(濟南)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9대손이다.
11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고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노송사(老松祠)에 배향되었다. 모(母)는 공인(恭人)으로 광주김씨(光州金氏) 부장(部將) 필구(泌銶)의 딸이요, 계비는 유인(孺人)으로 도강김씨(道康金氏) 홍우(弘佑)의 딸이다. 공은 선조(宣祖) 3년 경오(庚午 3903 ; 1570) 정월 10일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남다르고 기국과 도량이 비범함은 물론 무예 또한 출중하여 선조 21년 무자(戊子 3921 ; 1588) 약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를 거쳐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조의 의주 파천(播遷)에 호종(扈從)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지혜와 용맹을 모두 겸비하여 남방의 요충지를 방어할 만하다는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의 추천으로 곡포 만호(曲浦萬戶)에 제수되어 군함과 군비를 정비하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 정운(鄭運) ·
어영담(魚泳潭) · 배흥립(裵興立) · 김완(金浣) · 신호(申浩) 등의 장군과 함께 한산(閑山) · 사천(泗川) · 부산(釜山) · 제포(薺浦) · 당포(唐浦)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선조 28년 을미(乙未 3928 ; 1592) 병절교위 용양위 좌부장(秉節校尉 龍驤衛 左部將)과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의 혁혁한 전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에 특배되었으나 부임도 못한 채 동년 12월
27일 노량해전에서
아깝게 전몰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28세이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의 훈급에 올랐고 철권(鐵券)을 하사 받았으니, 공의 행적이 절의록(節義錄)과 충무전서(忠武全書)에 실려 있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해남 서쪽 산이면 고림치(古林峙) 해좌(亥坐)에 쌍분이다.
배는 영인(令人)으로 광산김씨 천추(千秋)의 딸로 1남을 두었으니 근최(勤最)이다. 6대손인 재일(載一)과 낙일(洛一)이 정조조(正祖朝) 때 문과에 입격하였으니, 재일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이르렀고, 낙일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다.
송은공(松隱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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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연지(鍊之)요 자는 정숙(精叔)이요 호는 송은(松隱)이니, 가락국 시조대왕인 어휘(御諱) 수로왕(首露王)의 59대손이다.
11대조인 중조는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휘는 관(管)이요 호는 정성헌(靖醒軒)이며, 입향조인 고조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휘는 하(河)요, 호는 백당(白棠)이다. 부(父)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노송사(老松祠)에 배향되었다. 모(母)는 공인(恭人)으로 광주김씨(光州金氏) 부장(部將)
필구(泌銶)의 딸이요, 계비는 유인(孺人)으로 도강김씨(道康金氏) 홍우(弘佑)의 딸이다.
공은 선조 10년 정축(丁丑 3910 ; 1577) 5월 17일 탄생하였으니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행이 극진하였다. 아버지의 중병에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목에 넘겨 3일을 더 연명하게 하였고, 어머니의 상에도 상장(喪葬)의 예를 다함은 물론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광해군(光海君) 7년 을묘(乙卯 3948 ; 161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인조 8년 경오(庚午 3963 ; 1630)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인조의 특별 포상으로 소학(小學) 1질을 하사 받아 지금까지 문보(門寶)로 전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여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가친 강서공(岡西公)과 함께 노천에
짚자리를 깔고 부자가 서로 바라보며 통곡하면서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진충보국(盡忠報國)할 것을 맹세하였다. 즉시 종숙 지촌공(智村公)과 함께 모의청을 설치한 후 가재도구을 팔아 군량과 군비를 마련하여 윤적(尹績) · 윤선계(尹善繼)와 함께 의병 300여명을 규합하여 나주(羅州)에 이르니,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㶿) · 대동찰방(大同察訪) 이기발(李起浡) · 순창군수(淳昌郡守) 최온(崔蘊) · 전한림(前翰林) 양만용(梁曼容)
· 전찰방(前察訪)
유집(柳緝) 등 5사람과 의병들이 도착하여 있었다.
공은 본현의 도유사 및 호남 의병장이 되어 여산(礪山)에 이르러 소모사 (召募使)인 기암 정홍명(畸庵 鄭泓溟)과 합세하여 청주까지 출전하였으나, 뜻밖에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접하고 통분을 금하지 못하여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였다. 끝까지 절의를 지키고자 소나무를 심어 당호(堂號)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하고,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서 자리의 오른쪽에 걸어놓고 지절(志節)을 지키려 하였다.
존주록(尊周錄)과 호남 창의록에 실린 공의 절의를 김원행(金元行)은 “일월(日月)과 그 빛을 겨룰 만하다” 하였고, 송환기(宋煥箕)는 “종묘사직을 보존하려는 충의라” 하였다. 조정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두문불출하다가 인조(仁祖) 19년 신사(辛巳 3974 ; 1641) 8월 8일에 천수를 다하니 향년이 65세이다. 노송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황산면 연호리 발우산(鉢盂山) 간좌(艮坐)에 쌍분이다.
배는 유인(孺人)으로 장흥임씨(長興林氏) 진영(振榮)의 딸로 4남 2녀를 두었으니, 4남은 여최(勵最) · 훈최(勛最) · 공최(功最) · 권최(勸最)요, 2녀는 민호(閔浩) · 이계담(李繼聃)에게 출가하였다.
송은공 둔세시(松隱公 遯世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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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운 (原韻) 〉
皇明日月暗風沙 : 나라의 해와 달이 풍진에 어두워지니
擊劍中宵慷慨多 : 칼을 치는 이 한밤 슬픔만이 복받치네
白首孤臣安所適 : 늙고 외로운 신하 가야 할 곳 어드메뇨?
湖山一路向南斜 : 호남으로 가는 큰 길 남쪽으로 비껴 있네
謹次 遯世韻 (삼가 둔세시의 운자로 지음)
四先志節掃胡沙 : 네 분 선조의 충절 호란을 평정코져
天地綱常萬古多 : 천지간에 삼강 오륜 영원히 이어가리
遺蹟至今何處在 : 남긴 자취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皇明日月老松斜 : 나라의 해와 달은 노송에 비껴 있네
정조 24년 경신(庚申 4133 ; 1800) 6월 상순
6대손 행(行) 예조정랑(禮曹正郞) 낙일(洛一) 근지(謹識)
狂風吹月漲胡沙 : 오랑캐가 밀려와서 호란을 일으키니
罔夜驅馳募義多 : 밤새도록 바삐 뛰며 의병을 모집하오
遺蹟千年松不老 : 남긴 자취 영원하여 소나무는 늙지 않고
皇明雨露翠陰斜 : 자연의 은택으로 푸르름만 더하누나
정조 24년 경신(庚申 4133 ; 1800) 6월 상순
6대손 행(行)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재일(載一)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