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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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장군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충절의 표상이 된 선조

문과에 급제한 선조

효성이 지극한 선조

장하신 효열부(孝烈婦)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 예찬하여 왔고

우리 민족은 부모에게 효도함을 최고의 가치와 덕목으로 삼아 왔다.

뿌리깊은 효도 사상은 우리 민족을 지탱하여 온 정신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과 앞으로의 후세들에게 참다운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진리이며 교훈이다.  

 

 

m03.png 효자 김한문(金漢文)

 

 

효자 김공은 입향조인 백당공(白棠公)의 8대손이며 지촌공(智村公)의 5대손으로 부(父)의 휘는 일대(一大)이다.

공의 자는 사유(士維)요 호는 어초야인(漁樵野人)이니, 영조 10년 갑인(甲寅 4067 ; 1734)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하고 곤궁하였으나 부모를 모시는 정성은 보통 사람이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하였다.

 

부모님께 생선 반찬을 마련하여 올리려던 차에 생선장수가 “생선 사시오” 라고 외치는 소리를 바람결에 듣고 머리에 쓴 갓이 벗겨져 땅에 떨어진지도 모르고 소리난 곳을 향하여 달려가기도 하였다. 또 부모님의 병환에 민물고기가 약으로 좋다 하였으나 때마침 엄동설한 추운 겨울이라 냇물이 꽁꽁 얼어붙어 구할 수가 없자, 눈물을 흘리면서 두꺼운 얼음을 두드리며 하늘을 향하여 빌었더니, 하늘도 공의 효성에 감동하였는지 큰 붕어 두 마리가 얼음을 깨고 뛰어나왔다. 그 붕어를 달여 드신 뒤로 어버이의 병환이 쾌유하게 되었으니, 주위에서도 신기해하며 공의 효행을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매일 새벽 첫닭이 울면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조상의 사당을 참배하는 일을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또한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무명옷에 비누도 넉넉하지 못하던 그 옛날, 부모님께서 이와 벼룩으로 고생하실 것을 염려하여 공은 몸에 참기름을 바르고 부모님 곁에 누어 자기도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와 벼룩을 공의 몸으로 유인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예를 극진히 갖추어 초상과 장례를 마치고, 후동의 묘소(마산면 오호리 뒷산)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을 하루같이 시묘(侍墓)하였다. 이러한 효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4105 ; 1772년 본군의 군수 권필칭(權必稱)이 염소를 잡아 직접 공의 집을 방문하여 치하하였고, 도백(道伯) 박기수(朴綺壽)는 쌀과 비단을 보내어 포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효성이 애석하게도 예조(禮曹)까지는 상달되지 않았지만 고종 32년 을미(乙未 4228 ; 1895) 삼강록 공의지(三綱錄公議誌)에 공의 효행이 실려 있어 본보기가 되고 있다.

 

 

 

m03.png 효자 김정오(金定五)

 

 

효자 김공은 입향조인 백당공의 9대손으로 조부의 휘는 성률(聲律)이요 부(父)의 휘는 세억(世億)이다.

공의 자는 운서(雲瑞)이니, 영조 1년 을사(乙巳 4058 ; 1725)에 탄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모시는 지극한 효심은 보통 사람들이 흉내를 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심으로 순진하였다. 집안 형편이 매우 곤궁하더라도 부모님이 즐기시는 맛있는 반찬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반찬을 사더라도 값을 깍지 않을뿐더러 고기장수가 값을 더 받거나 옳지 않게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부모님 봉양할 생선 값에 대하여 두 번 다시 말하지 아니하였다. 어버이께서 이질로 고생하고 계실 때 대변이 쓰고 단지 맛을 보았고, 백방으로 좋은 약을 구해드렸으나 효험이 없고 오직 참게탕을 잡수시려 하였다. 때는 엄동설한 추운 겨울이라 당연히 참게를 잡을 수 없으련만 오호리(五湖里 ; 당시는 저수지가 없고 바닷물이 드나들 때임) 강가에 나가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축원하였더니, 하늘도 공의 효심에 감동하였던지 참게가 얕은 여울의 돌 틈에서 모여 있기에 주어 담은 것이 바구니로 가득히 되었다. 이를 환후에 계신 어버이께 드렸더니 병이 완쾌하기도 하였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가 공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하여 이런 일이 있었노라며 칭송하고 치하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심에 6년 동안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초상 때처럼 슬퍼하며 흰옷를 입고 죽과 나물로 끼니를 이어갔다. 또한 어려서부터 실천하던 새벽에 사당의 참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며 늙어서도 한결같았다.

 

이런 효행을 향당의 추천에 의하여 유림의 김현국(金炫國) · 임방한(任邦翰) · 이연욱(李璉郁) · 민재후(閔載後) 등이 발의하여 고을에 올려 본영에 보고하였고, 본 고을 원인 김처승(金處昇) · 류인철(柳仁哲)이 여러 차례 공의 효행을 감영에 알렸으나 임금에게까지는 상달하지 못하였으니, 온 고을 사람 모두가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소제(蘇提) 송환경(宋煥經)이 지은 행장에 이르기를 “아 ! 애석하여라 임금에게 알려지지 않음이여” 라고 서술하였다.

공의 효행이 해남군 삼강록지(三綱錄誌)에 실려 있다.

 

 

 

m03.png 효자 김주호(金注鎬)

 

 

효자 김공은 입향조인 백당공의 15대손이며 지촌공 휘 안우(安宇)의 12대손으로 부(父)의 휘는 기찬(基燦)이다.

공의 자는 춘택(春鐸)이니, 4256 ; 1923년에 탄생하였다.

 

공은 하늘이 낸 효자로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하는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 오씨(吳氏)의 각별한 보살핌과 양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고, 아버지는 술집을 방랑하면서 가사는 돌보지 않았다. 공의 나이 15살에 할머니마저도 돌아가셨으니, 어린 마음에 탄식하여 이르기를  “나는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오늘까지 살아올 수 없었습니다. 나를 길러 주 신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곁을 떠나시니 이 무슨 박절한 일입니까?” 하고 애통해 하였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오래 고생을 하심에 아침저녁의 문안을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고, 집안 형편이 매우 곤궁하여 약을 사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할 계책이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웃사람의 도움으로 우마차(牛馬車)를 구입하여 화물을 실어 나름으로 생계를 삼을 수 있었다. 외출하여 돌아올 때는 항상 술을 사 가지고 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다. 어느 날은 밤늦게 집으로 오는데 백사(白蛇)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감으로 생포하여 아버지께 달여 드렸더니 공의 효심에 감동해서인지 아버지의 병이 쾌차하여 수년간을 건강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별세함에 애통해 함이 그지없었고 초상과 장사를 마친 뒤에도 매일 밤이면 성묘하기를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시종여일하였다. 계모를 모심에도 온갖 정성을 다해 좋은 음식을 구하여 봉양함과 아침저녁 문안 인사도 아버지가 생전에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 인근 동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공의 효행이 알려져서 면(面)과 군(郡)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4308 ; 1975년 8월에 작성된 효천장(孝薦狀)에는 산이면장·산이초등학교장을 비롯하여 지역 주민 다수와 해남향교의 전교·유도회장·12명 장의(掌議) 그리고 여러 선비 등이 연명으로 되어 있으니, 이 효천장이야말로 어느 훈장이나 어느 상패보다도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리라.

공의 효행이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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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장군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충절의 표상이 된 선조

문과에 급제한 선조

효성이 지극한 선조

장하신 효열부(孝烈婦)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 예찬하여 왔고

우리 민족은 부모에게 효도함을 최고의 가치와 덕목으로 삼아 왔다.

뿌리깊은 효도 사상은 우리 민족을 지탱하여 온 정신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과 앞으로의 후세들에게 참다운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진리이며 교훈이다.  

 

 

m03.png 효자 김한문(金漢文)

 

효자 김공은 입향조인 백당공(白棠公)의 8대손이며 지촌공(智村公)의 5대손으로 부(父)의 휘는 일대(一大)이다.

공의 자는 사유(士維)요 호는 어초야인(漁樵野人)이니, 영조 10년 갑인(甲寅 4067 ; 1734)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하고 곤궁하였으나 부모를 모시는 정성은 보통 사람이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하였다.

 

부모님께 생선 반찬을 마련하여 올리려던 차에 생선장수가 “생선 사시오” 라고 외치는 소리를 바람결에 듣고 머리에 쓴 갓이 벗겨져 땅에 떨어진지도 모르고 소리난 곳을 향하여 달려가기도 하였다. 또 부모님의 병환에 민물고기가 약으로 좋다 하였으나 때마침 엄동설한 추운 겨울이라 냇물이 꽁꽁 얼어붙어 구할 수가 없자, 눈물을 흘리면서 두꺼운 얼음을 두드리며 하늘을 향하여 빌었더니, 하늘도 공의 효성에 감동하였는지 큰 붕어 두 마리가 얼음을 깨고 뛰어나왔다. 그 붕어를 달여 드신 뒤로 어버이의 병환이 쾌유하게 되었으니, 주위에서도 신기해하며 공의 효행을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매일 새벽 첫닭이 울면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조상의 사당을 참배하는 일을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또한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무명옷에 비누도 넉넉하지 못하던 그 옛날, 부모님께서 이와 벼룩으로 고생하실 것을 염려하여 공은 몸에 참기름을 바르고 부모님 곁에 누어 자기도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와 벼룩을 공의 몸으로 유인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예를 극진히 갖추어 초상과 장례를 마치고, 후동의 묘소(마산면 오호리 뒷산)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을 하루같이 시묘(侍墓)하였다. 이러한 효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4105 ; 1772년 본군의 군수 권필칭(權必稱)이 염소를 잡아 직접 공의 집을 방문하여 치하하였고, 도백(道伯) 박기수(朴綺壽)는 쌀과 비단을 보내어 포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효성이 애석하게도 예조(禮曹)까지는 상달되지 않았지만 고종 32년 을미(乙未 4228 ; 1895) 삼강록 공의지(三綱錄公議誌)에 공의 효행이 실려 있어 본보기가 되고 있다.

 

 

 

m03.png 효자 김정오(金定五)

 

효자 김공은 입향조인 백당공의 9대손으로 조부의 휘는 성률(聲律)이요 부(父)의 휘는 세억(世億)이다.

공의 자는 운서(雲瑞)이니, 영조 1년 을사(乙巳 4058 ; 1725)에 탄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모시는 지극한 효심은 보통 사람들이 흉내를 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심으로 순진하였다. 집안 형편이 매우 곤궁하더라도 부모님이 즐기시는 맛있는 반찬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반찬을 사더라도 값을 깍지 않을뿐더러 고기장수가 값을 더 받거나 옳지 않게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부모님 봉양할 생선 값에 대하여 두 번 다시 말하지 아니하였다. 어버이께서 이질로 고생하고 계실 때 대변이 쓰고 단지 맛을 보았고, 백방으로 좋은 약을 구해드렸으나 효험이 없고 오직 참게탕을 잡수시려 하였다. 때는 엄동설한 추운 겨울이라 당연히 참게를 잡을 수 없으련만 오호리(五湖里 ; 당시는 저수지가 없고 바닷물이 드나들 때임) 강가에 나가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축원하였더니, 하늘도 공의 효심에 감동하였던지 참게가 얕은 여울의 돌 틈에서 모여 있기에 주어 담은 것이 바구니로 가득히 되었다. 이를 환후에 계신 어버이께 드렸더니 병이 완쾌하기도 하였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가 공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하여 이런 일이 있었노라며 칭송하고 치하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심에 6년 동안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초상 때처럼 슬퍼하며 흰옷를 입고 죽과 나물로 끼니를 이어갔다. 또한 어려서부터 실천하던 새벽에 사당의 참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며 늙어서도 한결같았다.

 

이런 효행을 향당의 추천에 의하여 유림의 김현국(金炫國) · 임방한(任邦翰) · 이연욱(李璉郁) · 민재후(閔載後) 등이 발의하여 고을에 올려 본영에 보고하였고, 본 고을 원인 김처승(金處昇) · 류인철(柳仁哲)이 여러 차례 공의 효행을 감영에 알렸으나 임금에게까지는 상달하지 못하였으니, 온 고을 사람 모두가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소제(蘇提) 송환경(宋煥經)이 지은 행장에 이르기를 “아 ! 애석하여라 임금에게 알려지지 않음이여” 라고 서술하였다.

공의 효행이 해남군 삼강록지(三綱錄誌)에 실려 있다.

 

 

 

m03.png 효자 김주호(金注鎬)

 

효자 김공은 입향조인 백당공의 15대손이며 지촌공 휘 안우(安宇)의 12대손으로 부(父)의 휘는 기찬(基燦)이다.

공의 자는 춘택(春鐸)이니, 4256 ; 1923년에 탄생하였다.

 

공은 하늘이 낸 효자로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하는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 오씨(吳氏)의 각별한 보살핌과 양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고, 아버지는 술집을 방랑하면서 가사는 돌보지 않았다. 공의 나이 15살에 할머니마저도 돌아가셨으니, 어린 마음에 탄식하여 이르기를  “나는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오늘까지 살아올 수 없었습니다. 나를 길러 주 신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곁을 떠나시니 이 무슨 박절한 일입니까?” 하고 애통해 하였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오래 고생을 하심에 아침저녁의 문안을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고, 집안 형편이 매우 곤궁하여 약을 사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할 계책이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웃사람의 도움으로 우마차(牛馬車)를 구입하여 화물을 실어 나름으로 생계를 삼을 수 있었다. 외출하여 돌아올 때는 항상 술을 사 가지고 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다. 어느 날은 밤늦게 집으로 오는데 백사(白蛇)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감으로 생포하여 아버지께 달여 드렸더니 공의 효심에 감동해서인지 아버지의 병이 쾌차하여 수년간을 건강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별세함에 애통해 함이 그지없었고 초상과 장사를 마친 뒤에도 매일 밤이면 성묘하기를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시종여일하였다. 계모를 모심에도 온갖 정성을 다해 좋은 음식을 구하여 봉양함과 아침저녁 문안 인사도 아버지가 생전에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 인근 동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공의 효행이 알려져서 면(面)과 군(郡)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4308 ; 1975년 8월에 작성된 효천장(孝薦狀)에는 산이면장·산이초등학교장을 비롯하여 지역 주민 다수와 해남향교의 전교·유도회장·12명 장의(掌議) 그리고 여러 선비 등이 연명으로 되어 있으니, 이 효천장이야말로 어느 훈장이나 어느 상패보다도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리라.

공의 효행이 해남 향교지(海南鄕校誌)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