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의 역사와 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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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건국설화

허황후의 설화

가락국의 발전과 멸망

허씨와 인천이씨

선김(先金)과 후김(後金)

 

1. 선김(金) - 가락국의 태조왕이신 휘 수로(首露)의 후예

2. 후김(後金) - 가락국왕의 후예가 아닌 김해김씨를 일컫는다.

후김에는-

1) 신라 경순왕의 후손 金時興

2) 임진왜란 때 왜장으로 침입했다가 귀화한 사야가(沙也可)의 孫 한국명 金忠善

3) 김충선과 같이 귀화한 金誠仁의 후손

3. 수로왕손이나 姓이 틀린 姓氏

1) 許씨 - 가락국왕 휘 수로의 둘째 셋째 아들손 許씨에는 7적(籍)이 있으니 金海, 陽川, 河陽, 泰仁, 孔岩, 漢山, 成昌, 許씨가 있다.

2) 李씨에는 1적(籍)이 있으니

시조(始祖) 허겸(許謙)이 사성하여 인천이씨(仁川李氏)

 

김해김씨 가운데는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이 있다.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을 '선김'이라 하고, 경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일본인으로서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賜姓)을 받은 김충선(金忠善)계의 김해김씨를 '후김' 이라 한다. 경순왕계(敬順王系)의 후김경순왕계의 후김은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는데, 김렴은 경순왕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김해김씨가 되었다.

 

그의 후손 김시흥(金時興)이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과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김해김씨로 써오다가 조선조 헌종(憲宗) 15년 기유(己酉 4182:1849) 금녕김씨(金寧金氏)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들 후손 가운데 옛 김해김씨 족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족보를 보아 김시흥을 중조로 삼는 것은 모두 금녕김씨로 보면 된다.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귀화한 후김·일본인으로서 귀화한 후김은 김충선(金忠善)을 시조로 하는데,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휘하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한 사야가(沙也哥)는 상륙한지 1주일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金應瑞)장군에게 몰래 글을 보내어 귀순의 뜻을 밝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장수가 된 그는 울산 · 경주 ·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18개의 왜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에 감복한 선조(宣祖)는 친히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서 금(金)을 얻었다" 고 하며 김해김씨의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들은 김해김씨와 혼동을 피해 《사성(賜姓)김해김씨》라 칭하면서도 호적과 족보에는 김해김씨로 올라 있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사위가 되어 경상북도 우록(友鹿)골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 후손들은 지금은 대개 우록(友鹿)으로 본관을 삼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김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후김으로 지칭되고 있다.

 

 

 

가락국의

건국설화

허황후의

설화

가락국의

발전과 멸망

허씨와

인천이씨

선김(先金)과

후김(後金)

 

1. 선김(金) - 가락국의 태조왕이신 휘 수로(首露)의 후예

2. 후김(後金) - 가락국왕의 후예가 아닌 김해김씨를 일컫는다.

후김에는-

1) 신라 경순왕의 후손 金時興

2) 임진왜란 때 왜장으로 침입했다가 귀화한 사야가(沙也可)의 孫 한국명 金忠善

3) 김충선과 같이 귀화한 金誠仁의 후손

3. 수로왕손이나 姓이 틀린 姓氏

1) 許씨 - 가락국왕 휘 수로의 둘째 셋째 아들손 許씨에는 7적(籍)이 있으니 金海, 陽川, 河陽, 泰仁, 孔岩, 漢山, 成昌, 許씨가 있다.

2) 李씨에는 1적(籍)이 있으니

시조(始祖) 허겸(許謙)이 사성하여 인천이씨(仁川李氏)

 

김해김씨 가운데는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이 있다.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을 '선김'이라 하고, 경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일본인으로서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賜姓)을 받은 김충선(金忠善)계의 김해김씨를 '후김' 이라 한다. 경순왕계(敬順王系)의 후김경순왕계의 후김은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는데, 김렴은 경순왕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김해김씨가 되었다.

 

그의 후손 김시흥(金時興)이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과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김해김씨로 써오다가 조선조 헌종(憲宗) 15년 기유(己酉 4182:1849) 금녕김씨(金寧金氏)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들 후손 가운데 옛 김해김씨 족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족보를 보아 김시흥을 중조로 삼는 것은 모두 금녕김씨로 보면 된다.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귀화한 후김·일본인으로서 귀화한 후김은 김충선(金忠善)을 시조로 하는데,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휘하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한 사야가(沙也哥)는 상륙한지 1주일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金應瑞)장군에게 몰래 글을 보내어 귀순의 뜻을 밝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장수가 된 그는 울산 · 경주 ·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18개의 왜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에 감복한 선조(宣祖)는 친히 그를 불러“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서 금(金)을 얻었다" 고 하며 김해김씨의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들은 김해김씨와 혼동을 피해 《사성(賜姓)김해김씨》라 칭하면서도 호적과 족보에는 김해김씨로 올라 있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사위가 되어 경상북도 우록(友鹿)골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 후손들은 지금은 대개 우록(友鹿)으로 본관을 삼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김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후김으로 지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