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봉에 탄강(誕降)한 김수로왕은 단기 2375(서기 42)년 3월 15일, 9간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국호를 '대가락국(大駕洛國)'이라 하고 김해(金海)를 도읍지로 정하였으며, 단기 2381(서기 48)년 7월 27일 멀리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배를 타고 온 허황옥(許皇玉)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당시 가락국의 경계는 동쪽은 황산강(낙동강),
서남쪽은 남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였고,
호구(戶口)는 10,000여호에 인구는 75,000여명이었다.
가락국이 위치한 김해지역은 낙동강 하류 삼각주(三角洲)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남부인지라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비옥하여 농수산물이 풍족한 고장이었다. 그러므로 주변 나라들이 영토를 확장하려고 호시탐탐 욕심내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므로 외세(外勢)와의 충돌과 전투가 빈번하기도 하였다. 또한 바다가 가까이 있어 선박과 수군(水軍)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육군과 수군의 군사를 맡은 통치기구가 정비되어 있음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가락국은 낙동강 하류에 강성한 세력을 형성하여 변한(弁韓) 지방까지 아우르며 신라와 백제에 맞서는 강력한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팽창해짐에 따라 가야 지역의 일부가 신라와 백제에 의해 점령되었다.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19년 백제가 김해지역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가락국을 침공하였다.
낙동강 연안에서 피아간 사상자가 속출하고 전쟁이 속히 끝나지 않게 되자, 구형왕(仇衡王)은 국력의 한계와 군사력의 부족함을 느끼고 군사와 백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평화적으로 왕위를 신라에 넘겨주었으니, 이때가 단기 2865(서기 532)년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지 491년만인 10대 구형왕 12년이다.
구형왕이 전쟁을 하지 아니하고 평화적으로 신라에 양위(讓位)를 함은 시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계승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지봉에 탄강(誕降)한 김수로왕은 단기 2375(서기 42)년 3월 15일, 9간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국호를 '대가락국(大駕洛國)'이라 하고 김해(金海)를 도읍지로 정하였으며, 단기 2381(서기 48)년 7월 27일 멀리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배를 타고 온 허황옥(許皇玉)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당시 가락국의 경계는 동쪽은 황산강(낙동강),
서남쪽은 남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였고,
호구(戶口)는 10,000여호에 인구는 75,000여명이었다.
가락국이 위치한 김해지역은 낙동강 하류 삼각주(三角洲)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남부인지라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비옥하여 농수산물이 풍족한 고장이었다. 그러므로 주변 나라들이 영토를 확장하려고 호시탐탐 욕심내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므로 외세(外勢)와의 충돌과 전투가 빈번하기도 하였다. 또한 바다가 가까이 있어 선박과 수군(水軍)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육군과 수군의 군사를 맡은 통치기구가 정비되어 있음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가락국은 낙동강 하류에 강성한 세력을 형성하여 변한(弁韓) 지방까지 아우르며 신라와 백제에 맞서는 강력한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팽창해짐에 따라 가야 지역의 일부가 신라와 백제에 의해 점령되었다.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19년 백제가 김해지역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가락국을 침공하였다.
낙동강 연안에서 피아간 사상자가 속출하고 전쟁이 속히 끝나지 않게 되자, 구형왕(仇衡王)은 국력의 한계와 군사력의 부족함을 느끼고 군사와 백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평화적으로 왕위를 신라에 넘겨주었으니, 이때가 단기 2865(서기 532)년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지 491년만인 10대 구형왕 12년이다.
구형왕이 전쟁을 하지 아니하고 평화적으로 신라에 양위(讓位)를 함은 시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계승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